http://blog.naver.com/kjzinoe/220790991254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22&aid=0003138498&date=20170121&type=1&rankingSeq=1&rankingSectionId=103
민비라고 부르는게 식민사관일까요? 조선은 비빈제 국가로 정실왕비를 비, 후궁을 빈으로 불렀습니다. 후궁에게 경빈, 의빈, 숙빈... 이렇게...물론 정실왕비를 중전으로 부르지만후궁의 호칭으로 봤을때 정실왕비를 민비라고 부르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이조시대라고 사용하는 것이 식민사관이 아니라 유럽식 봉건제도형태(일본도 비슷하지만)에서 왕조를 표현하는 것인것 같습니다. 영국을 튜더왕조, 스튜어트왕조 이렇게 가문으로 부르는 것처럼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왕비인 신덕왕후 검색해보세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후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 8월에 현비(顯妃)로 책봉되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무위키 - 명성황후편사적인 경우에 그녀를 가리킬
때, 공식명칭을 사용할 것인지 공식명칭이 아닌 '민비'를 사용할 것인지는 순전히 개인의 호불호 문제인 것이다.비판적으로 보는
이들 대부분은 '민비'로 그녀를 호칭하는 걸 보면 이 논란은 어떤 명칭으로 그녀를 부르는지보다는 그녀를 보는 관점과 더 관련이
깊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은 명성황후와 마찬가지로 성+비로 된 명칭이 호칭의 하나로 사용되었던 순정효황후 윤씨의 경우는
1983년 이후로 이런 논란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왕비나 후궁을 호칭할 때 지위명, 시호,
직첩명+성씨(또는 성+직첩명) 등을 사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경우다. 공식명칭이 아닌 명칭이 백성들 사이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명칭들은 공식적인 게 아니니 사료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폐서인이 된
왕비가 아닌 이를 '성+비'로 된 명칭으로 호칭한 경우가 사료 중에 하나라도 발견이 된다면, 당대에 백성들 사이에서 그런 명칭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이 지은 격문
<왜놈 대장 보거라>에서 보면 '더욱이 우리의 민비를 살해하고도 너희 놈들이 살아서 가기를 바랄쏘냐.'라는 부분이
있다. '민비'라는 부분을 '국모'로 쓴 경우도 있는데, 독립기념관의 기록과 국가보훈처 대표블로그에서는 '민비'라고 쓴다. 그리고
매천야록에 그녀를 가리킨 호칭의 하나로 '민비'가 있다윤희순 의사와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둘 다 양반으로, 명성황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당대에 아예 없는 명칭을 새로 만들어서 호칭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낮다.
고종의 5남의 차남이라서 왕 되기도 힘들고 왕이
된다고 해도 순헌철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수준이 안되는 사람을 두고 세종이나 정조에 갖다 붙이다니... 경악이다. 이우가
결혼한 부인이. 박영효의 손녀인데. 박영효는 갑신정변실패하고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가 하면서 속았는지 아니면
당시 조선보다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발전했던 일본을 본받으려고했는지 어느쪽인지 몰라도 일본 하수인 노릇을 했다는 평을 듣는 사람..
그런데 일본여자가 아니라 그 박영효 손녀랑 결혼했으니 민족의식 있다고 칭송하는 수준... ㅋㅋㅋㅋㅋㅋ
민비는 민씨성을 가진 왕비라는 뜻이며
민비가 죽을때까지 국호는 조선이었고
대한제국이 된이후 1897년에야 황후로
추존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농간으로 명성황후를 민비라 부르게
억지로시켰다면
고종은 왜 이황제 또는 고종황제로만 안부르고 고종이라고 부릅니까?
또한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이전시대 조선왕들
전부 황제로 추존되었습니다
세종은 왜 세종대왕입니까?
세종황제라 불러야죠
민비로 부르든 명성황후로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명성황후로 안부른다해서 친일파로 몰진 마십시오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76] 조선 甲富 민영휘의 '돈 모으는 법'
1909. 8. 29.~1910. 8. 29.
1935년 12월 말, 조선 내 최대 갑부 중 한 사람으로서 일본의 2류 재벌과 비교되던 민영휘(閔永徽)가 84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잡지 삼천리는 '1천 2백만원이라는 민영휘 재산은 어디로 가나'라는 글을 게재한다.민영휘는 187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하여 도승지, 평안감사, 강화유수, 내무부사, 선혜청 당상, 좌찬성 등 화려한 관력을 자랑한다. 명성황후와는 촌수가 먼 편이지만 당시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던 여흥 민씨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권력을 이용한 토색(討索·재물을 탈취함)으로 단번에 조선 내 유일의 갑부가 된다.
그의 부(父) 민두호도 일찍이 돈을 긁어모아 '쇠갈구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신문은 나라가 현재와 같이 된 것은 민영휘의 탐학이 한 원인이라 하고 그를 '망국대부'라 지칭한다(대한매일신보 1907.12.20, 1909.4.18.).
그의 재산 규모에 대해 잡지는 '평안감찰 시대 적부터 삼천리강산에서 성금 격으로 긁어모으고 또 황실 내탕금을 이리저리 하여 모은 것이 4천만원이고 또 그 외에 중국 상해 회풍(홍콩상하이)은행에 적립하여 놓은 것이 수천만원'이라 한다. 4천만원은 현재 화폐로 약 1500억원에 해당한다. 갑오·을미년(1894·95)의 추수곡이 13만석이었는데 10만석으로 잡아도 연간 수입이 50만원이었다.
- ▲ 조선 내 최대 갑부 중 한 사람으로서 일본의 2류 재벌과 비교되던 민영휘(閔永徽), 회풍은행 금고에 돈을 넣는 민영휘를 풍자한 '대한민보' 1909년 9월 25일자 만화.
민영휘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그에게 가산을 탈취당한 이들의 재산환수소송 기사가 지면을 달구었다. 1909년 1월경 9건의 환수소송이
벌어진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민영휘가 전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 백성으로부터 탈취한 재산이 수만냥을 헤아리는데 이때에 이르러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 혹 재판소에 소송하기도 하고, 혹 그의 집에 뛰어들어 칼을 빼어들고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고
기록한다. 민영휘의 상해 이주설도 나돌았다.(신한민보, 1909.3.31.)
국운은 기울어도 그의 권력욕은 끝이
없었다. 그는 "조선이 일본의 형제국이니 일본의 보호국 되는 것은 부끄러울 것 없다"면서 일본황실 종묘를 매년 참배키로 하더니
마침내 총리대신 자리까지 넘보았다. 이런 그를 두고 대한매일신보는 "총리하면 타려고 마차까지 준비하였으나 마차는 부서지고 그
말까지 죽었다니 거미줄로 바위 얽듯 애를 쓰던 경륜이 도로아미타불이라. 말은 비록 미물이나 돈만 아는 저 화상을 주인으로 섬기기가
원통하여 죽었구나. 아들 빚 물어주고 칠 일이나 병 앓더니 이번 저 말 죽은 후엔 며칠이나 통곡할꼬"(1910.2.5.)라고
냉소하였다.
강제병합 후 권력을 탐할 수 없게 되자 민영휘는 경제로 눈을 돌린다. 1915년부터 한일은행장으로
재임하다가 70세에 은퇴하고 2세들에게 경영을 넘긴다. 서자인 대식(大植)·규식(奎植)이 가산을 물려받아 식민지 권력과 유착하면서
부동산과 주식으로 '민씨왕국'을 이룬다. 조선 최대의 부를 가진 민영휘였지만 자선에 인색했던 탓인지 한 일간지만이 짤막한 한 줄
사망기사를 실었을 뿐이다.
드라마에서 몇 번이나 재현한 조선의 19대 왕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장희빈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서 인현왕후가 바로 여흥 민씨다. 이 나라에 민씨는 여흥 민씨 하나 밖에 없다.
인현왕후의 형제로는 큰오빠 민진후, 작은 오빠 민진원, 남동생 민진영이 있었는데, 큰오빠 민진후의 후손 민치록(閔致綠)이 민비의 생부이다. 그리고 남동생 민진영의 후손 민치구(閔致久)는 흥선대원군의 장인이다.
민치록과 민치구는 서로 10촌지간 친척이다.
훗날 민치록은 왕비의 오빠로서 권력을 쥐게 되지만, 그는 슬하에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민치구의 차남 민승호(閔升鎬)를 양자로 입적하였다.
민승호는 훗날 대원군이 물러난 후 민씨 무리의 수령 노릇을 하였다.
민승호의 친형(즉 민치구의 장남)은 민태호(閔泰鎬)이고,
민승호의 친동생(민치구의 삼남)은 민겸호(閔謙鎬)로서 1882년 임오군란때 피살되었다.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 민진원의 후손으로 민태호(閔台鎬)라는 자도 있었는데, 민비의 12촌 오빠였다. 민태호(閔台鎬)는 순종비의 생부이기도 한데 1884년 갑신정변때 피살되었다.
민태호(閔台鎬)의 동생으로 역시 민비의 12촌 오빠가 되는 민규호(閔奎鎬)도 있다.
1905년 을사조약 후 자살한 민영환(閔泳煥)은 임오군란때 피살된 민겸호의 친아들이다.
그 외에도
민영상(閔泳商) :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공조판서, 충청도 관찰사, 호조판서, 이조판서, 내무아문 대신, 궁내부 특진관 역임
민영규(閔泳奎) : 판서 벼슬 두루 거치고 갑오경장 후 궁내부 대신, 1910년 일본 자작 작위 받음
민영위(閔泳緯) : 민비의 13촌 조카. 대사헌, 평안감사, 이조판서, 좌찬성,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의 여주 피난 주도
민영목(閔泳穆) : 민비의 11촌 조카. 병조판서. 1884년 갑신정변 때 피살
민영익(閔泳翊) : 민태호(閔台鎬)의 아들. 판의금부사, 선혜청 당상, 의정부 찬정. 을사조약 후 홍콩으로 망명, 상해에서 사망
민영소(閔泳韶) : 병조판서, 한성판윤, 규장각 학사, 학부대신, 궁내부대신, 농상공부 대신, 1910년 일본정부 자작 작위 받음
민병석(閔丙奭) : 대사성, 도승지, 평안감사. 1910년 일본정부 자작 작위.
민두호(閔斗鎬) : 독판내무부사, 춘천부유수
민영휘(閔泳徽) : 민두호의 아들. 중추원 의장, 시종원경, 헌병대 사령관, 표훈원 총재. 1899년 대한천일은행 설립, 1910년 일본 자작 작위. 일제 시대 조선 최고 갑부 중 하나
등등 수 많은 민씨들이 민씨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부와 권세를 누리며 살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3&aid=0000033801
[원희복의 인물탐구]<오하기문> 번역 김종익… 120년 전 민비의 악행에서 현재를 보다
그렇게 기억되다 ‘잊혀진’ 그가 매천 황헌의 <오하기문·梧下記聞>을 번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은행원 출신의 평범한 시민이 어려운 한문서적, 그것도 일제 침략에 항거해 자결한 매천의 <오하기문>을 번역했다는 소식은 ‘의외’였다. 이 책은 670쪽이 넘는 분량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500개가 넘는 각주를 달았다. 책에서 각주는 필자가 연구한 ‘각고의 노력’의 증거다. 그는 “훨씬 많은 각주가 있었는데, 출판사에서 너무 책이 두꺼워진다는 이유로 뺐다”고 말했다.
박맹수 원광대 교수도 “고증을 위해 탐색한 문헌에는 <동경대전>을 필두로 <조선왕조실록> 전반, 사서삼경을 포함한 중국의 13경, <한서>와 <후한서> 등 중국의 모든 역사서는 물론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근대중국사료 총간> 등 한국·일본·중국 자료를 모두 참조했다”고 그의 학문적 성실성을 놀라워했다. 그는 <오하기문>을 번역하게 된 계기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오하기문>은 ‘오동나무 아래서 들은 것을 기록한다’는 뜻으로, 매천이 동학농민전쟁 현장에서 들은 것을 정리한 것이다. 1990년 초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이이화 선생과 <한국민중사 자료집-1894년 농민전쟁편> 강독 때 처음 이 책을 읽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1994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아 처음 번역했다.(그 책은 <번역 오하기문>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그러나 당시 직장에 다니며 시간에 쫓겨 번역하다 보니 오류도 많고, 빠진 것도 있어 이번에 제대로 번역한 것이다.”

서당 하시던 외할아버지에게 한문 배워
김종익은 서당을 하시던 외할아버지 무릎에서 한문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한글보다 한문을 먼저 배웠고, 중학교 시절 이미 자치통감을 읽었다”면서 ”은행원이 된 뒤에도 한학자 이광호 선생님에게 공부를 계속했고, 태동고전연구소(당시 지곡서당)에 10년간 왕래하며 책을 읽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의 한문 내공은 근 30년이나 됐던 것이다. 특히 태동고전연구소는 한문학이나 역사학 석사과정을 마쳐야 입학이 허락되는 수준으로 웬만한 한문실력이 아니면 입학하기조차 어렵다.
매천이 이 책에서 말하려 했던 동학농민전쟁의 진실과 교훈은 뭔가.
“매천은 맨처음 ‘나는 국가와 백성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재난이나 변란이 우연히 발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나는 이 대목을 번역하는 데만 100번도 넘게 쓰고 지웠다. 매천은 동학도를 ‘도적’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는 왜 백성이 도적이 됐나를 기록하고 있다. 결국 매천은 동학농민전쟁의 원인과 실상, 즉 조선이 어떻게 망국으로 이르게 됐는가를 기록하려 했던 것이다.”
매천의 기록은 1862년(철종 13년)부터 시작된다. 매천은 ‘관군이 지나가면 지역이 약탈로 초토화되는데, 농민군이 지나가면 쓰러진 벼도 일으켜 세우고 간다’고 직접 듣고 본 것을 기록했다. 여타 동학농민전쟁 기록이 있지만 <오하기문>은 현장을 매우 구체적이고 정밀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매천은 잠깐 성균관 관원을 했지만, 부패한 현실에 환멸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 은둔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왜 자결로 망국의 책임을 져야 했을까.
“그는 도학가이다. 중국 북송시대 철학자 장재는 도학가란 ‘하늘과 땅을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해 도를 세우고, 과거 성인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연다’고 규정했다. 매천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삶을 지배하는 철학(도)이 없어진 세상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매천은 유서(절명시)에서 ‘세상에 글을 아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고 했다. 글을 아는 지식인(지성인)의 의무를 강조한 것일 게다. 하지만 요즘 지식인은 의무는커녕 부조리의 주범이 되고 있다. 이는 120년 전 3정을 문란케 한 탐관오리와 다를 바 없다. 김종익 역시 탐욕스런 공무원이 판치는 최근 법조비리와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지도자의 모습이 당시와 너무 흡사하다고 말했다.
“민비가 임오군란을 피해 충주로 피난을 갔을 때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서울로 돌아온 민비는 이 신통한 무당을 진령군에 봉하고 신임하자, 조선의 고위 관료들이 그에게 아첨했다. 민비의 진령군을 보면 박근혜 대통령 주변 최모씨와 똑같다. 조선을 놓고 열강이 벌이는 싸움도 지금과 너무 흡사하다. 지금 독자들이 이 책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그런 ‘기시감’(데자뷰) 때문이 아닐까.”

지식인의 의무 강조한 매천의 유서
최근 논란의 중심인 최태민 목사의 딸과 이로 인한 국정농단 얘기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죄를 짓고도 끝까지 속죄할 줄 모르는 탐욕스런 공무원들을 보면서 인간의 염치, 자기 모멸감, 자괴감 등이 사라졌다고 한탄했다.
김종익은 1954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강릉상고를 나와 은행원이 됐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교사이고, 처가도 교사집안이다. 그는 은행원이 인간의 존엄성을 세우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은행원 생활을 하며 야간대학을 나왔다. 전공도 한문이나 역사와 무관했다.(그는 대학과 전공을 한사코 밝히길 거부했다)
사실 <오하기문>은 사건의 현장을 찾아 보고·듣고·확인해 기록하는 요즘 기자들이 취재해 보도하는 르포르타주(르포)와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매천은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광범위한 르포 기사를 쓴 기자라 할 수 있다. 김종익은 “소설가 김훈이 ‘나는 매천의 <오하기문>을 옆에 끼고 살았다, 요즘 기자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쓴 글이 생각난다”면서 “이 글의 의미를 몰랐지만 이제 이해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는 소설가 김훈이 원래 기자 출신이라고 말해줬다.
하지만 매천은 현장 이야기만 쓰지 않았다. 매천은 갑오년(1894년·고종 31년) 5월 3일 청나라가 일본에 통지한 외교문서도 기록했다. 그 시대 먼 전남 구례에서 한양(서울)에서 벌어진 외교문서까지 ‘취재’해 보도하는 놀라운 취재 능력을 보인 것이다.(매천이 기록한 글에는 오자와 생략이 많아, 역자 김종익이 원사료를 찾아 전문을 그대로 실었다) 무엇보다 매천은 용기 있는 비평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다. 매천은 병인년(1866·고종 3년)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가을에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했다. 포성이 날마다 서울까지 들렸다. …하지만 하응(대원군)은 태연한 모습으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잠시도 공사를 멈추지 않고 진행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하응의 이런 행위를 영웅다운 수완이라고 했다. 아아! 나는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입장을 거의 일방적으로 적은 기존 기록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불편부당이라는 이유로 기계적 중립성에 안주하는 요즘 언론에 경종을 울린다. 군주제 시대 군주의 아버지(대원군)인 절대권력에 ‘아아!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외칠 수 있는 기개가 놀랍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오동나무 아래서 역사를 기록하다>는 제목은 지금 기자들에게 ‘신권위주의 권력 아래서 진실을 말하다’라고 경종을 울리는 느낌이다. 오싹 소름이 돋는 대목이다.
그는 다산 정약용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지만 “다산 연구는 힘들 것 같다”고 고백했다. 앞으로 계획된 일이 줄지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12년 <적도에 묻히다>(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저, 역사비평사)라는 책을 번역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인도네시아로 끌려가 연합군 포로 감시원을 하면서 한편으로 항일투쟁을 했던 비운의 조선인 양칠성의 이야기다.
그는 앞서 <적도에 묻히다>와 같은 맥락인 조선인 전범 이야기를 번역 중인데, 민족문제연구소를 통해 곧 출판될 예정이다. 이밖에 1930년대 동북에서 활동하던 항일투쟁가 양정우 이야기, 한국이나 북한 국적이 아닌 조선적(籍)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의 이야기 등 일본어로 된 책 몇 권을 번역하고 있다.
기자가 “앞으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려는가”라고 질문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지금 계획된 번역이 마무리되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5~10년 계획으로 한국과 일본 관련 기록물, 특히 일제강점기 시대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 자료 번역 계획
어둠이 깔리자 인터뷰는 인근 막걸리 집으로 옮겨 계속됐다. 노란 양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와 숙주나물 무침이 나왔다. 술기운에 기자의 질문은 더 노골적이고 직선적이 됐다. 가족 얘기가 나왔다. 부모와 처가 모두 교사집안에 선생이 된 여동생은 전교조 활동을 하다 해직됐고, 남동생 역시 역사교육학과(성균관대)에 다니다 학생운동으로 여러 번 감옥에 갔다고 했다. 특히 남동생은 전노협·공공연맹 등 노동운동을 하다 1999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
집안이 그렇게 반골기질인가.
“반골기질이라기보다 현실 부조리에 항의하는 용기를 가진 집안이다.”(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는 ‘반골기질’과 ‘선비기질’이 혼합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왜 노무현을 좋아했나.
“나는 노사모 회원이 100명이 채 안 됐을 때 가입한 초창기 멤버다. 노사모는 2000년 4월 그가 지역감정에 정면으로 대항하며 부산에 출마해 떨어졌을 때 만들어졌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가가 드러난다. ‘추운 겨울이 된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름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노무현이라는 한 인간의 진정성이 마음에 닿았다. 그에게서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나 유배를 당한 다산(정약용)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그는 의외의 말을 했다. 그는 정약용이 그랬던 것처럼 ‘분노하지 않는다’고 했다. 민간인 사찰 재판이 끝났을 때 장진수 주무관에게 점심을 사주며 ‘우리는 분노하지 맙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민주화·노동운동으로 남동생을 잃고 몇날 며칠을 울고 지낸 그가, 권력에 직장을 빼앗긴 여동생을 둔 그가, 본인 스스로 권력 사찰의 피해자로 직장과 노후를 잃은 그가 ‘분노하지 말자’고 외치는 것은 의외다.
한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작가는 <분노하라>는 책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분노를 일깨웠다. 요즘 젊은이는 물론 야당마저 ‘분노’할 줄 모르는 세태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딱 요구되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200만부 넘게 팔렸다. 기자는 “그렇게 당하고도 분노하지 않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그건 매천이 권력을 질타했던 <오하기문>의 정신과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거듭 “분노를 넘어 가야 할 길이 있고, 분노의 대상에게도 삶의 존엄성이 있다”면서 “그것을 잃으면 인류의 희망은 없다”고 말했다. 그가 너무 순진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달관했기 때문일까. 기자와 김종익은 이수역 근처 허름한 막걸리집에서 밤 늦게까지 이 논쟁을 계속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mg.com>


2008.08.08. 15:27
http://saluvia1004.blog.me/53626369
조선독립단 3인의 수장, 그중에 윤희순이 있었다
평생을 바쳐 항일투쟁의 길을 간 최초의 여성의병장
![]() |
조국의 위기 앞에서
여자이기보다는 항일투사이길 바랐던 윤희순
나라를 잃고 망명길에 올라
죽음보다 더 힘겨운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 |
1895년 민비 시해를 기점으로 조선 각지에서는 항일의병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위정척사파의 보수적인 유생들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이때 국권수호를 외치는 한 여성의 목소리가 있었다. 윤희순이였다.
춘천과 제천 일대의 의병운동을 이끈 고흥 유씨 가문에 시집온 윤희순. 그녀는 누구보다도 항일저항의지가 남달랐다. 그러나 보수적인 유학자 집안의 맏며느리였기에 집을 떠나 의병활동을 하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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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안사람들이여 일어나라!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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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희순이 직접 쓴 의병노래 |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
우리도 나가 의병하러 나가보세
- <안사람 의병가> 中
그러나 윤희순은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의병 후방 지원과 함께 여성의병대의 필요성을 느꼈다.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와 같은 의병선동가를 지어 밤낮없이 부르고 다녔고, 노래의 힘은 강했다. 1907년 정미의병이 봉기 당시 70여 명에 달하는 여성의병대가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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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붓을, 그리고 한 손에는 총을
우리의 민비를 살해하고도 너희 놈들이 살아서 가기를 바랄쏘냐.
아무리 유순한 백성이라 한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알았단 말이냐.
이 마적 떼 오랑캐야 좋은 말로 할 때 용서를 빌고 가거라.
우리 조선 사람들은 화가 나면 황소, 호랑이와 같으니라!
-격문 <왜놈대장 보거라> 中
일제를 향한 분노는 윤희순이 지은 격문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녀의 한 손에는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붓이,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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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망명, 여성의병대장에서 항일투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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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요령성의 노학당터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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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독립운동에 바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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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조국해방을 보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둔 시아버지, 남편, 며느리. 그들의 죽음은 윤희순에게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935년 6월, 조선독립단 청년들에게 강의를 하던 장남 유돈상이 강의를 마치고 처갓집에 머물던 중에 일본경찰의 습격을 당해 처참한 고문 끝에 7월 죽는다. 서른다섯 살에 낳은 첫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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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비의 아내 윤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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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희순이 남긴 <일생록> |
사랑하는 가족의 잇단 죽음. 76세의 윤희순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일생록>을 통해 남긴다. 중국 망명생활을 시작한 뒤 70평생을 낯선 곳을 전전하며 쫓겨 다녀야 했던 떠돌이 생활이었다.
시아버지 유홍석, 남편 유제원과 윤희순 그리고 아들 유돈상 유교상 3대에 이은 항일투쟁. 이것은 불과 100여 년 전 우리 할머니, 혹은 그 할머니의 이야기다.
고·순종 시대사 - 27. 청국의 개입과 민비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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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7. 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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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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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서창
장수성
6월 23일, 장수성은 청국 조정에 대조선 파병을 요청하였고, 산동에 있던 오장경을 천진으로 불렀다. 다음날, 청국 정부는 장수성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장수성은 산동으로 돌아왔던 마건충과 정여창을 조선에 보냈다. 6월 26일의 일이었다. 그 다음날에 청군은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29일, 일본 공사 하나부사도 군함 4척과 수송선 3척으로 대대 병력을 인솔하고 인천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은 7월 3일에 입경하고, 7월 5일에 고종을 알현하여 피해 보상을 요구하였다. 고종을 알현하고 나서 대원군과도 회견한 다음 3일 이내로 찬부를 결정하라고 요구하였다.
고종은 영의정과 예조 판서에게 회담을 진행하라는 언질을 주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산릉을 보호하겠다는 핑계로 회담을 거절하였다. 이에 하나부사는 서기관 한 명을 남겨 두고,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경인에 상당한 병력을 배치하고 교섭의 결렬을 행동으로 표시하겠다는 것은 위협이며 공갈이었다.
청군이 인천에 도착한 이후의 동태를 살펴 보면, 장수성은 마건충이 건의한 대로 병력을 증파하기로 하였다. 7월 7일에 광동 수사 제독 오장경에게 4천의 병력을 인솔하게 하고 군함 5척을 출동시켰다. 이들은 남양만에 도착했는데, 인천의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마건충은 7월 10일에 김윤식과 함께 입성하였다.
오조유
7월 12일, 오장경과 정여창은 오조유, 원세개 등과 함께 입성하고, 오장경의 부대는 성 밖에 주둔시켰다. 7월 13일, 오장경, 정여창, 마건충은 말을 타고 운현궁으로 달려가 대원군과 필담을 나누었다. 그들은 대원군에게 청국 진영으로 강림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대원군은 어쩔 수 없이 수락하고 말았다.
대원군은 7월 13일 오후에 이용숙과 이조연을 대동하고 청군 진영을 찾아 갔다. 청군 진영을 방문한 대원군은 마건충과 필담을 나누다가 청군에 의해 납치되어 남양만으로 향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 한 몸 마련한 계책 없이 수심에 빠진 채 가고 있다. 입을 열어 말할 수도 없고, 몸을 의지할 곳도 없다. 추위와 궁핍 때문에 가마 안에서 졸도하여 불성이 되었다. 그 때, 병정 한 명이 계피를 입에 넣어주며 담배 태울 것을 권한다.'
대원군 일행은 15일, 남양만에 도착하였다. 17일에 정여창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조선 국왕께서 행장과 수행원을 파송한다고 하였으니 그들이 도착하면 내일 아침에 출범하겠습니다."하였다.
이 때, 대원군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고 한다.
정든 산천과 고국은 의연한데(有意山川依故國)
끝 없는 바다 이것이 나의 집이라(無邊江海是吾家)
7월 18일이 되었으나 대원군의 수행원이 도착하지 않자, 이에 관계없이 출항하였다.
1882년 6월 10일부터 7월 13일까지 33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군란을 이용하여 재집권했던 대원군이 하루 사이에 납치당하여 조선에서 사라지자 민비에게도 회천의 기쁨이 찾아왔다. 7월 25일에 서상조의 상소를 가납하는 형식으로 왕비의 생존을 공표하고 국상을 폐하였다. 그러나 척족의 거물인 민태호는 국가의 체면상 당장 민비를 데려오지는 말고, 적당한 시기에 모셔오자고 주장하였다. 민태호는 이 때문에 민비의 오해를 받아 사형에 처할 뻔 하였다.
어쨌든 왕비 봉영의 절차는 영의정 이하 대관들이 직접 장호원으로 가서 왕비를 모셨고, 7월 26일에는 오장경의 명령으로 청군 1백 명까지 충주로 가서 시위하였다. 28일에는 왕비의 행렬이 충주를 떠나 8월 1일에 창덕궁에 도착하였다. 민비가 환궁하자 숨 죽이고 있던 세도의 바람이 다시 살아나고 산중에 은신하였던 민비당은 다시 나타나서 전날과 같이 정계를 휘둘렀다.
http://blog.naver.com/gu951231/220394918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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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조선의 국모다. 명성황후(11) - 조선책략과 임오군란 전야
- 2011.11.28.
- 대원군이 10년 동안 모은 국고를 고종 부부가 불과 1년 만에 탕진하였던 것이다. 특히 미신을 믿고 무당을 가까이 하였던 민비는 원자가 태어나자 잘 자라기를 바라...
- 청원미학역사연구소 cafe.naver.com/chung...
김기협 역사학자
고종 즉위 직전, 1860년경이 되어서야 북경이 서양 오랑캐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보며, 적어도 명-청 교체 이후로는 처음으로 비상한 상황이 닥치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1864~73년 세도 정치의 틀을 따르면서도 극단적 쇄국 정책과 함께 전례 없이 강한 개혁 정책을 추진한 대원군 집권은 위기에 대한 첫 국가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요즘 표현으로 출구 전략이 빈약한 정책이었다. 폭력적 수단에 의한 강압적 개혁 정책으로는 국가의 획기적 체질 개선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항의 필요가 절실해지는 데 비해 개항을 위한 준비는 더뎠다. 1873년 말 대원군이 정권을 내놓은 것은 더 이상 대책이 없어서 스스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개혁을 해놓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대원군이 물러난 후 정권을 넘겨받은 민 씨 일파는 역시 세도 정치의 틀에 따라 권력을 운용하면서 국가의 진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책을 별로 강구하지 않았다. 대원군의 개혁 중 가장 의미가 큰 것이라 할 수 있는 서원 철폐를 집권하자마자 뒤집어 놓은 데서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강화도조약 체결 등 대외 관계의 진전이 있었지만, 사세에 떠밀려 진행된 일일 뿐, 능동적 조치를 취한 것이 거의 없다.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 수신사를 일본에 보낸 후 4년이 지나서야 2차 수신사를 보낼 정도였다.
김홍집이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에야 장래에 대비하는 움직임이 조금이나마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때 <조선책략>이 들어와 청나라 양무파의 정책 노선이 알려짐으로써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초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일본과 청나라에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파견한 것이 대표적인 움직임이었다. 탐색의 방향은 양쪽이었지만, 청나라보다 열성적으로 조선에 접근해 온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는 추세를 별기군 창설이 보여준다.
민 씨 정권의 부패에 대한 불만과 개화 정책에 대한 불안감이 겹쳐져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청나라 양무파 정권이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국정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적극적 협조에 기대를 걸고 있던 급진 개화파가 1884년 말 갑신정변을 일으켜 반전을 꾀하다가 실패한 후 청나라의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1882~94년 조선 간섭기의 청나라 정책은 일본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조선에서 변화의 계기를 억누르는 방어적 노선이었다. 시국에 관한 주견 없이 권력 유지에 만족하는 민 씨 집단이 주견이 강한 대원군보다 다루기 쉽기 때문에 청나라의 선택을 받았다. 1891년 이후 민 씨 세력 수령으로서 당대 으뜸의 탐관오리로 명성을 날린 민영준(후에 영휘로 이름을 바꿈)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민영준은 원세개의 조종에 따라 동학혁명 진압을 위한 청나라 출병 요청을 주도, 청일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장본인이었는데, 나중에는 일본 쪽에 붙어 합방 후 작위까지 받은 대단한 인물이다.
(이번 작업에서 조선 내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깊이 살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무엇보다 동학농민전쟁에 이르는 경위와 양상을 개관하면 당시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을 텐데, 필자의 능력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 이번 작업에서는 비 연구자로서도 윤곽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대외 관계와 지배층의 향배에 관심을 제한한다. 이후라도 사회경제적 상황까지 설명 범위에 끌어넣을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보완 작업을 하고자 한다.)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서 최대의 경쟁자를 물리쳤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일본이 요구한 조건이 엄청난 것이었다. 조약을 체결하러 시모노세키에 간 이홍장이 일본 국수주의자에게 총격을 당하는 바람에 조건이 다소 완화되었다고 하는데도 당시 열강들 사이의 상식으로 납득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1주일 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조건의 완화를 권하는 '3국간섭'에 나섰다. 세 나라, 특히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3국간섭이 이뤄진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요구 조건이 워낙 황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간섭이 성립된 것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이 한 차례 승전을 계기로 일거에 동아시아 지역 패권에 접근하려 한 것이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은 1890년 출범한 의회의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892년 7월 출범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1893년 말 중의원을 해산했지만 새로 선출된 의회는 이듬해 5월 내각 탄핵 상주안을 가결했다. 1894년 6월의 사태 발생에서 8월 1일 선전포고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서두른 것은 국내의 정치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을 종결함에 있어서도 여러 정파를 두루 만족시키기 위해 가혹한 강화 조건을 관철시켜야 했고, 조선의 뒤처리도 서두르게 되었다.
서두르는 과정에서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을 저질렀다. 일본이 청나라를 따돌린 후 조선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면서 국왕의 정치 개입을 억제하는 데 대한 반발로 고종 측근 세력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시도했다. 3국간섭에서 러시아의 힘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성과를 거두기에 조급한 일본인이 측근 동원에 능란한 왕비를 제거하고 왕을 공포에 몰아넣기 위해 일을 저질렀는데, 얼마나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사건인지 충분히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개항 이후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위기의식을 가진 조선인이 국가의 진로를 생각하는 데는 두 가지 방향이 엇갈리고 있었다. 청나라와의 전통적 협조 관계를 지키느냐, 이웃의 신흥 강국 일본과의 협력 관계를 만드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느 방향이든 대다수 사람들은 조선의 국체 보존을 기본 전제로 삼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보호되려면 자기가 속한 사회가 보호되어야 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로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인식한 것이 국가였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선택에서도 어느 쪽이 국가를 지키기에 좋은 길이냐 하는 것이 첫 번째 기준이었다. 개화의 효율성 같은 것은 국가가 지켜진 뒤에 부차적으로 따질 문제였다.
청나라는 전통적 관계 때문에 대다수 조선인들이 경계심을 덜 품는다는 이점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임오군란 이후의 간섭기 동안 많이 까먹었다. 대원군을 납치하고 부패한 민 씨 정권을 옹호하는 편의주의적 태도가 환멸을 불러일으켰고, 중국 상인의 과도한 보호 등 이익에 대한 집착으로 전통적 관계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켰다. 청일전쟁으로 완전히 쫓겨나기 전에 조선인들의 마음에서는 이미 스스로 벗어나 있었던 셈이다.
청나라가 쫓겨나는 것을 보고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주도권을 대세로 받아들였다. 일본이 요구한 '개혁' 수행에 김홍집이 앞장선 것은 일신의 영달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뜻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아관파천 후 그가 죽음을 맞는 상황에 관해 다소 엇갈린 서술들이 있지만, 그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애국심과 합리성을 갖춘 많은 사람들이 일본 주도의 개혁에 종사하고 일본의 어느 정도 이권도 인정해 줄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조선 궁궐을 짓밟고 왕비를 살해한 것이다! 최소한의 신뢰를 깨뜨린 행위였다. 이 씨 왕조가 시원찮으니 다른 왕조를 세워야겠다든지, 이제부터의 세상에서는 왕국보다 공화국이 적합할 테니 왕실을 없애야겠다든지, 아무 대안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현존하는 국가의 상징을 군화발로 뭉개버린 것이었다. 상징성의 유린을 통해 조선 사회와 조선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일본에게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은 강화도조약 이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드러나 왔지만, 적어도 말만은 이웃을 돕는 '선의'를 내세워 왔다. 그 가식을 꿰뚫어본 사람도 일본이 최소한의 체면만은 지켜 나갈 것을 기대하며 그 현실적 힘을 존중하려 했다. 그런데 일본은 을미사변에서 극악한 야욕을 극악한 방법으로 드러냈다. 내키지 않더라도 일본의 힘과 존재를 받아들이려던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고 현실적으로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궁궐을 짓밟고 왕비를 살해한 자들이 못할 짓이 무엇이란 말인가!
▲ 이승만이 하야할 때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모두 이승만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권력의 무상함을 비감해 한 사람들도 있고, 국가 주권의 상징이 흔들린다는 사실 자체를 마음 아파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원군 실각 이후 '민비'가 정치에 관여한 데 대해서는 포폄의 시각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을미사변을 통해 '명성황후'가 조선의 상징으로서 일본의 극악한 야욕을 드러낸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론의 여지없이 큰 공헌이었다. ⓒ프레시안 |
을미사변 석 달 후인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있었다.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1월 28일에도 왕이 미국 공사관으로 도망하려다가 실패한 소위 춘생문사건이 있었는데 그 후 러시아 공사관 측과 긴밀하게 의논하며 준비한 결과 잠행에 성공한 것이다.
왕의 이어(移御)가 친일 정부를 바로 붕괴시킬 수 있었던 데는 을미사변으로 인한 인민의 분노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시 서울에만도 1000여 명의 일본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병력은 겨우 100여 명이었다. 12년 전 갑신정변 때는 왕을 붙잡고 있던 소수의 일본 군대를 다수의 청나라 군대가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그 때에 비해 일본이 러시아와 정면으로 대결하기 힘든 문제도 있었지만, 조선 인민의 반일 감정을 더 이상 악화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관파천이 고종 측의 독자적 결단이냐, 러시아 측의 획책에 따른 것이냐 하는 논란이 있다. 서영희의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관파천에 대해 고종의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현직 러시아공사인 베베르와 스페에르가 본국 정부의 승인을 받기도 전에 고종을 설득하여 단행한 것이라고 추정한 연구도 있으나(최문형, 2000, "아관파천과 러일의 대립", <한국학논집> 34, 한양대학교), 당시 러시아 정부의 최대 관심이 만주에 있었고 조선은 완충지대로서의 가치밖에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두 공사가 본국 정부의 방침을 어겨가면서까지 아관파천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8쪽)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내게는 최문형의 관점이 더 그럴싸하게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러시아가 조선보다 만주를 중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주석의 <제정러시아 외교문서로 읽는 대한제국 비사>(이담 펴냄) 중 "러시아 외교 라인의 면면"(34~36쪽)을 보면 당시 러시아의 정책 결정자들에서 실무자들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가 뒤섞여 있어서 정책 혼선이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를 통째로 포섭할 기회가 나타났을 때, 만주 진출 정책을 지키기 위해 기회를 외면한다는 것은 설령 대 일본 온건파라 하더라도 취할 길이 아니었을 것 같다.
노주석의 책에는 파천 당일 쉬페이예르(스페에르) 대리공사가 로바노프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문이 수록되어 있다.
1896년 2월 2일 전문으로 보고한 바와 같이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밀지를 보내 수일 안에 왕세자와 함께 공사관에 피신하겠다는 희망을 밝혀 왔다. 전임 대리공사 베베르와 함께 고종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보호하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 (…) 다음 날(2월 3일) 고종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2월 9일 저녁 공사관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으나 이날 결행하지 않고 경비병 증원을 요청해 왔다. 공사관은 알렉세예프 극동 총독에게 긴급 요청, 2월 10일 해군대령 몰라스가 100명의 수병을 인솔하고 서울에 왔다. 고종은 2월 11일 새벽 7시 30분에 공사관에 왔다.
파천 이전에 공사관은 준비를 위해 극동 총독의 협조를 받고, 외무장관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 측의 독자적 결정을 러시아가 순순히 받아줄 수 있는 부담 없는 일이 아니었다. 러시아가 아무리 일본과의 정면 대결을 꺼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3국간섭처럼 일본을 견제할 필요는 분명한 상황이었다.
설령 조선에 대해 궁극적인 야심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조선 정부를 포섭해 놓는 데는 협상 카드로서라도 매우 귀중한 가치가 있었다. 아관파천의 기획에 러시아 공사관, 특히 1885년 이래 10년 넘게 조선에 주재하며 고종의 특별한 신임을 얻고 있던 베베르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민영위
[ 閔泳緯 ]- 조선 후기의 문신. 고종 때 이조참판, 사헌부대사헌, 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여주의 자택으로 피난시키고, 민응식 등에게 호위하도록 하였다. 1883년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출생-사망 | 1818 ~ 18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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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여흥 |
자 | 석경 |
시호 | 충문 |
출생지 | 여주 |
본관 여흥. 자 석경(碩經). 시호 충문(忠文). 여주(驪州) 출생. 1848년(헌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로 장원, 1865년(고종 2) 이조참판을 지냈다. 1869년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고, 1875년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를 여주의 자택으로 피난시키고, 민응식(閔應植) 등에게 호위하도록 하였다. 1883년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민병석
[ 閔丙奭 ]이칭별칭 | 경소(景召), 시남(詩南), 의재(毅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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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출생 - 사망 | 1858년 12월 12일 ~ 1940년 8월 6일 |
성격 | 친일반민족행위자 |
출신지 | 충청남도 회덕 |
성별 | 남 |
본관 | 여흥(驪興) |
관련사건 | 청일전쟁, 만민공동회, 한일병합조약 |
저서(작품) | 고종황제보령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高宗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 고구려 동명왕릉비(東明王陵碑) |
대표관직(경력) | 농상공부대신, 군부대신, 궁내부대신, 자작, 이왕직장관, 중추원 부의장 |
정의
1858(철종 9)∼1940. 문관·고위관료·정치가·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58년 12월 12일 충청도 회덕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소(景召), 호는 시남(詩南)·의재(毅齊)이다. 민관식(閔觀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예조판서를 지낸 민영위(閔泳緯)의 아들 양손자로 입양되었다. 조선 말기에 동부승지, 이조참판,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농상공부대신, 군부대신, 철도원 총재, 헌병대 사령관, 궁내부대신 등을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장관, 조선귀족회 회장, 중추원 부회장, 조선사편수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였다. ‘경술국적(庚戌國賊)’으로 지탄을 받았으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암으로 투병하다 1940년 8월 6일 일본 도쿄의 병원에서 사망했다.